*주님, 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여 주소서.
from 서울주보 (2012년 2월 26일) 최인호 씀
인디언의 기도는 하느님이 틀림없이 들어준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가령 비가 오지 않을 때 인디언이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면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가 올 때까지 계속 기우제를 올리기 때문이랍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제 어떤 기도도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의 기도는 백발백중입니다. 아니 제 기도의 적중률은 인디언의 기도를 능가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청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 밖에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 아버지께서는 보너스로 나머지도 “곁들어 받게”(마태 6,33) 해주셨으므로 백퍼센트를 훨씬 초과 달성해주십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하면 주님은 악하고 선한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듯 모두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통화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핫라인입니다. 이 긴급 직통전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도, 기도를 청할 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말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살려 달라’고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SOS의 모스부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니체의 말처
럼 하느님은 죽은 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18,19)
문제는 기도를 백 퍼센트 들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우리가 눈이 어두워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저처럼 눈이 어두운 소경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습니다.(루카 17,11-19 참조) 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 하고 청하였고, 주님은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열 명의 환자는 사제를 향해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아홉 사람은 어디 갔느냐?’ 하고 물으시며 돌아온 환자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축복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저는 제가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한 환자이지 고마움을 모르는 아홉 사람 중 하나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야말로 주님께 돌아와 찬양한 환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헤일 수 없이 수많은 기도를 올리면서도 아홉 환자처럼 조금 전까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울며 기도했던 순간마저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시치미를 떼고 감쪽같이 기적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완전범죄(?)를 저지르시기에 저는 그것이 당연한 결과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게 주님에게서 멀어져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만 고통이 없다는 것은 못 느낀다. 두려움을 느끼지만 평화는 못 느끼며, 갈증이나 욕망은 느끼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금세 잊어버린다. 마치 심한 갈증으로 허겁지겁 물을 마신 후에는 남은 물을 버리는 것처럼.”
저는 끊임없이 기도를 통해 애원하면서도 막상 제 기도를 들어주신 주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이루어진 기도를 금방 잊어버리고 남은 물을 버리는, 엎드려 찬양할 줄 모르는 정신적 나환자입니다. 아아, 참으로 불쌍한 것은 오히려 저를 위해 기도하시는 하느님과 그렇게 사랑을 베풀어주셨음에도 잠깐 사이에 세 번이나 배신하는 저의 약하디 약한 베드로적 믿음입니다.
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 발을 씻겨주시고 무엇보다 “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저를 위해 기도하여 주소서.”(루카 22,32)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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