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5일 토요일

소설가 최인호 암투병기(8)


*. 주님,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풀어주소서 (2)

    - from 서울주보(2012년2월18일)  최인호 씀

제 방 탁자 위에는 1987년 여름 영세받을 때 선물로 받은 키 60센티미터 정도의 ‘파티마’ 성모상이 있습니다.
저는 매일 막무가내식 떼 기도를 올릴 때마다 성모상을 두 팔로 껴안고 합장하여 모은 성모님의 손에 머리를 들이댄 공격적인 자세로 묵주기도를 올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경스러운 자세였지만 성모님은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젖을 먹이기도 했을 터이니, 제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운다고 해서 성모님이 저를 매정하게 밀치시 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무슨 자국을 보았습니다. 바탕이 짙은 초콜릿 빛깔인 탁자 위, 내가 기도하는 바로 앞자리위만 하얀 얼룩무늬가 번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았더니, 제가 흘린 눈물 자국이었습니다. 눈물에 강한 소금기가 있다는 상식은 알고 있었지만 옻칠한 탁자를 탈색시킬 만큼 방울진 눈물 자국이 작은 포도송이처럼 맺혀 있는 모습을 보자, 저는 제 슬픔에 겨워 닥치는 대로 떼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고 주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때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때는 바로 지금이 아닙니까. 제가 비록 주님을 모시기엔 합당치 않사오나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 부어라.’(요한 2,7: 공동번역 성서)라고 이르셨듯이 제 육체의 항아리에 ‘물을 부어라.’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제
가 포도주가 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앙앙 엉엉엉.”

결론적으로 말하면 2010년 10월 27일, 마침내 저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암치료로 빠진 손톱에는 약방에서 고무 골무를 사다 끼우고, 빠진 발톱에는 테이프를 칭칭 감고 구역질이 날 때마다 얼음 조각을 씹으면서 미친 듯이 하루에 20에서 30매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원고를 썼습니다. 반세기에 가까운 작가생활 동안 누구보다 왕성하게 글을 많이 썼던 저였지만 이렇게 집중하고 이렇게 단숨에 활기 넘쳐 창작을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쓰는 느낌이었으며 제 손은 자동재봉틀처럼 저절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
하여 12월 26일, 정확히 두 달 만에 1,200매의 전작 장편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설의 제목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입니다. 작품이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성모님은 아드님께 제 기도를 전해주셨고,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주시어 저를 포도주로 만들어주신 것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제가 쓴 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처음엔 좋은 작품을 쓰다가 나중에는(나이가 들수록) 덜 좋은 것이 나오는 법인데 이 좋은 작품(포도주)이 병중에 나오니 웬일이오.”(요한 2,10 참조: 공동번역 성서)
저는 이미 ‘말씀의 이삭’란에도 두 차례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 쓰는 글이 먼젓번 글보다 더 여러분을 거나하게 취하게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제 떼의 기도에 ‘항복!’하시고 질 좋은 포도주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가을날」에서 노래하였습니다.
“주님 때가 왔습니다 / (중략) / 마지막 잎새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주시고 /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풀어주소서 /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스며들게 해주소서…”
자비로운 주님은 제게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스며들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눈물의 포도송이는 포도주가 되었나이다. 이틀이면 충분하나이다. 우리 모두 서정주의 시 「행진곡」에서처럼 “결국은 조금씩 취해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이오니 주님, 초대받고 온 저마다의 손님들에게 더 좋은 포도주를 충분히 대접하고 흥겨운 잔칫날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금 고통받는 사람들,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인생의 잔칫날에서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어 조금씩 취해
서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돌아갈 수 있도록. 주님,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허락하소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첫사랑, 포도주의 첫 기적을 지금 여기서 베풀어주소서. 아멘.
주님,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풀어주소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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