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5일 일요일

소설가 최인호의 암투병기(3)

소설가 최인호 씨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에 올린 암 투병기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암에 걸린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살면서 항상 따라다니는 걱정과 두려움에 대한 쓸데없는 고민(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으로 절망하는 나약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얘기입니다. 당연히 저도 포함해서,,

* 아픔에로의 부르심             
                                                 from 서울대교구 '서울주보' 2012년 1월15일 최인호 씀

옛 중국의 선사 석상(石霜)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백척이나 높은 작대기 끝에서 어떻게 하면 걸을 수가 있겠는가.”
제자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스스로 대답했습니다.“백척이나 높은 작대기에 올라가 능히 앉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진리에 이른 것은 아니다.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발자국 나가보라. 그렇게 되면 시방세계의 모든 진리를 보게 되리라.”

제가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육체의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끊임없는 걱정과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루 24시간 매 순간이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죽고 사는 백척 작대기 위에 앉아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만 있어서는 되겠는가.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처럼 괴롭히는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온갖 걱정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길한 망상 때문인데 어째서 일어나지도 않은 현상을 미리 가불해서 앞당겨 근심하고 있단 말인가.

저는 몇날 며칠을 제 불안에 대한 정체를 직시해 보려 했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 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를 잊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조용히 쉬지 않고 안달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소화 데레사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다. 과거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집착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현재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사리분별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불교의 골수인 금강경에는 이런 명구가 나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선승 황벽(黃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는 감이 없고,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다.(前際無去 今際無住 後際無來)”
주님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못 박고 계시지 않습니까.“…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34)
제가 내일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빵을 달라는데, 돌을 주시겠습니까. 아들인 제가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시겠습니까. 제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믿기보다 저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더 믿어 교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고 계신 아버지께서 제 날개를 꺾어 땅에 떨어뜨리겠습니까.
백척간두에서 유일하게 사는 방법은 한 발자국 더 나가는 일이며, 성난 파도를 잠재우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하는 유일한 방법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인당수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길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 벼랑 끝으로 오라. / 그들이 대답했다. / 우린 두렵습니다. / 그가 다시 말했다. / 벼랑 끝으로 오라. / 그들이 왔다. /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과거를 걱정하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날개를 가진 거룩한 천사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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