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인호 씨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에 올린 암 투병기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극한 고통속에 있을때 기도를 하게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이때, 기도와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현재의 고통의 이유를 해결해 달라고, 구하고, 협박하고, 흥정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글을 보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릴수 있음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엿가락의 기도.
from 서울대교구 '서울주보' 2012년 1월22일 최인호 씀
병세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문득 제 머릿속에 떠오른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 7,7:공동번역 성서)
이것은 무기력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길은 기도뿐이었으며, 제가 찾고 구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기도를 통한 주님뿐이었습니다.
저는 미친 듯이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열중하여도 좀처럼 제 가슴에는 평화가 깃들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 한가운데 서시며 내려주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제 마음에 여전히 찾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제 기도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 기도는 ‘주님, 제 병을 고쳐주십시오.’, ‘주님, 기적을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 병을 고쳐주시면 주님을 위한 글을 쓰겠습니다.’라는 식의 주님과 벌리는 흥정이었으며, 조건부 협상이자 벼랑 끝 전술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감히 주님께 던지는 막무가내식 생떼이자 명령이자 협박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순종하셨고, 주님께서도 피땀을 흘리시며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순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불경에는 ‘무엇이든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든 것이 고통이요, 구하는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즐거움이다.’라는 명구가 있습니다. 당나라의 선승 마조(馬祖)는 말하였습니다.
“진정으로 법을 구하는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夫求法者 無所求)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도 말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청하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마라.”
그렇습니다. 제가 그처럼 열심히 기도했지만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였던 것은 잘못 구하고, 잘못 찾고, 잘 못 문을 두드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음을 구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마라. / 모든 것을 얻기에 이르려면 /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마라. / 모든 것이 되기에 이르려면 / 모든 것이 되려고 하지 마라. / 모든 것을 알기에 이르려면 /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바로 그 무렵 정진석 추기경께서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추기경께서는 단 한마디만 제게 전하였습니다.
“베드로 형제님, 하느님을 믿으세요.”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못 박고 계시지 않습니까.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마태 6,8:공동번역 성서)
제가 그토록 기도했으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 하였던 것은 제가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고, 이를 구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의 기도는 엿가락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주님께 완전히 저를 맡기겠습니다. 다만 제가 쓰는 글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달콤한 일용할 양식이 게 하소서.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요즘 저는 80%정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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